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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요한복음 21장 1절-25절 강해 111215


요한복음은 20장에서 이미 끝난 분위기인데 다시 21장이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기에 기록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과 그 후의 대화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특별히 이 요한복음이라는 서신을 받는 공동체의 모종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A.D. 70년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를 사는 청중들, 예수님을 본적은 없고 다만 그 제자들인 베드로의 삶과 죽음, 그리고 현재 살아있는 사도인 요한을 알고 있는 청중들에게 이 복음서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를 느껴 20장 이후 일종의 후기(post-script)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청중들이 이미 보고 알고 있는 제자 베드로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요한의 인격을 보고 아는 이들에게 이 복음서가 요한의 증언에 기반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20장 이전의 내용 역시 참된 증언이라고 부언하는 것이지요.


본문의 내용은 20장과는 다른 지리적 공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전 두 번 나타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나타나셨던 예수님께서 뚜렷한 지침없이 제자들을 두신 듯하여 마침내 제자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모양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갈릴리 출신들 역시 디베랴 호수로 돌아와 있고 3절에서 시몬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방향 없이 그저 일상의 생업으로 돌아가 있는 제자들의 삶을 요한은 “그 날 밤” 혹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4절 이후 예수님의 등장은 “날이 새어갈 때”와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더라(6절)”라는 대조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으나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제자공동체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초기 부르심의 현장(눅5장)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하시므로 부활을 경험한 제자 공동체가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따름)을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라는 명령에 순종하므로 많은 고기를 잡자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요한은 저 멀리서 그런 조언을 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외치는 소리에 베드로는 이내 반응하여 예수님께 헤엄쳐 달려갑니다. 먹고 사는 일상의 문제로 돌아가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기억나게 하는 떡과 숯불에 구운 생선을 준비시켜 놓고 계셨습니다. “조반을 먹으라”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짧게는 며칠 전 유월절 식사에서부터 멀리는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과 그 이후의 생명의 떡에 대한 대화(이것 역시 디베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일)를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했으나 일상을 살아가는 문제에서는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적용하지 못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는,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하려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그물을 채워 주시고 그것 없이도 생선과 떡을 공급해 주심으로 궁극적으로 먹고 사는 일상의 문제의 주인이 자신임을 다시 한 번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하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와 대화하십니다(15-17). 이 대화는 21장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다루어지는 부분입니다. 대부분 세번의 반복의 의미는 베드로의 세번의 실패에 대한 예수님의 다루심으로 이해합니다. 기억의 반복이란 측면에서 생선과 떡을 먹이신 것과 연계하여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지도자를 잃은 양들의 목자로 그들을 먹이신 것(요한복음 6장의 배경)처럼 베드로와 제자공동체가 참 지도자가 부재한 상태의 양을 먹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먹이시는 사역으로 양을 치는 모습의 본을 보이신 것처럼 제자 공동체도 먹이는 사역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 제자공동체의 임무는 예수님을 따라 사람들의 목자가 되어 사람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실제로 먹이고, 그를 통해서 목양함)


부활이후의 시기를 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제자공동체의 삶의 방향을 새롭게하시려는 예수님은 늘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성향의 베드로를 통해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18-24). 이 부분의 핵심 단어는 "나를 따르라"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에 다시금 제자, 제자공동체는 아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에서 이 “따름”이란 주제는 늘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늙음과 죽음의 맥락에서 이 단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서 늙고 죽기까지의 일상의 삶이 부활의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속도나 강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고정된 지점이라기 보다 다름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대개 이 본문을 통해 목회자들은 목양의 리더십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이 본문은 제자들이 유념하여야 할 것은 팔로워십(followership)입니다. 베드로가 그러듯이 남과 비교하고 남보다 더 속도를 내려 하기보다 그저 죽기까지 예수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제자들의 삶의 특징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재한 것 같은 시대, 생노병사와 먹고 사는 문제로 고통하며 고민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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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 K. Chee 1391 지성근 1391 지성근 목사

ELBiS Club 고린도전서 7장 32절-40절.  111121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맥락에서 7장 전체를 선물의 관점에서, 부르심의 관점에서, 종말의 관점에서 결혼을 생각하도록 권고하던 바울은 이제 마지막으로 무엇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무엇이 주의 일을 염려하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진심을 담아 던집니다.

 

보통 32절에서 35절의 내용은 실제로 대부분의 결혼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결혼하면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남편)를 기쁘게 할까" 한다는 말이 바울이 기혼자들을 혹은 결혼제도를 반대하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의 의도가 무엇일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의 말처럼 이 말을 하는 것이 이 편지를 받는 자들의 유익을 위함이지 올무를 놓으려는 것이 아니라는(35절) 바울의 말의 진정성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고린도교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하는 순전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자들이 현재 무엇을 염려하며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결혼했느냐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몸과 영의 거룩을 추구하는 삶인가(34절), 혹은 주께 대한 헌신이 잘 정돈되고 어떤 것에도 흐뜨러지지 않는가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볼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글을 대하는 사람들이 당혹해 할 것을 예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합니다, " 너희의 삶이 얼마나 정돈되어 있지 않는지 얼마나 흐뜨러져 있는지 정말 주를 섬기고 있으며, 주를 기쁘시게 하고 있으며 주의 일을 염려하고 있는지"

 

여기서 '주의 일'과 '세상 일'을 원래 구조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전체적인 바울의 사상과 성경전체의 이야기와 맞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 방향이 주를 향할 때 그것이 주의 일이고 그 방향이 세상을 향할 때 그것은 세상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36절이하의 약혼자가 이미 있는 경우의 예와 39절 이하의 과부가 된 경우의 예를 이야기하면서 바울은 구조적으로 결혼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결혼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기 보다(38절) 만일 결혼을 한다면 그 방향에 있어 "주안에서"(39절)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바울은 (그 개인사에서 경험했던 결혼관계와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인한 이혼당함을 가정했을 때) 자신의 경험과 일반적인 당시의 풍토를 유념하면서 결혼하지 않고 그대로 지내는 것이 정말 주를 섬기는 방향을 선택하는데 있어 더 잘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줆로 생각하노라"라고 감히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교만하게 느껴지기 보다 정말 회중에게 무엇이 좋을지를 안타깝게 권면하는 마음이 느껴진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결혼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무슨 일, 무슨 사역도 늘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스스로 염려하고 스스로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서도 마치 주의 일을 염려하고 주를 기쁘시게 한다는 착각을 하고 살기 쉽상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 그 섬김이 규모없고 흐트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진정성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14장 22-23절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우리 믿는 바로 스스로 확증하고 판단할 수있을 것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바로 이 먹는 문제가 다음 장인 8장의 주제가 되는 데 이것 역시 몸이라는 주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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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 K. Chee 1391 지성근 1391 지성근 목사


ETT 요한복음 20장 1절-31절        111117

19장을 읽다가 20장을 읽으면 정말 그 분위기의 반전이 드라마틱하다 할 수 있습니다. 빈무덤을 본 당혹감, 놀라움을 지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말하려고 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놀라운 고백으로 끝나는 본문을 읽으면서, 그리고 샬롬으로 인사하시는 예수님의 인사(Peace be with you)를 대하면서 해석공동체가 활력(?)을 경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본문의 반복되는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본문을 통해 요한이 이야기하려는 바가 드러납니다. 초반부에서 '무덤'(9회)이 반복되고 있고, 후반부에서 '보다'(11회)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단어 역시 8회 반복되고 있습니다. 빈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막달라마리아,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은 부활의 객관적 증언을 구성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주관적 반응을 자아내는 주된 요인이지만 요한은 독자인 제2세대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하여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29절)"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사도들의 진술 혹은 기록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소위 과학주의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관찰과 증거를 넘어서는 사실과 지식, 생명의 영역이 있다는 것, 인격적 증언(주를 보았다, 만졌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요한복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우선 빈무덤을 대하는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의 모습과 막달라 마리아의 디테일이 살아있는(7절 수건, 세마포) 이야기를 통해 그 당시 부활의 증거였던 빈무덤의 증거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인 "누군가가 시체를 옮겼다"(cf.마28장 11-15절)에 대해 오히려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베드로도 빈무덤을 보았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9절)"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고, 막달라마리아도 누군가가 옮겨갔다고 생각하였지만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박힌 손과 창 찔린 옆구리를 보고 심지어 도마(아마 요한도 포함해서 cf. 요일1:1)의 경우 손으로 만지는 경험을 통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의 주장인 가현설(docetism)을 겨냥하고 있음도 분명합니다. 예수의 역사성, 부활의 역사성과는 상관없이 신앙의 그리스도만을 외치는 현대적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할 말이 있는 대목입니다.

본문의 구조상 앞의 빈무덤에 대한 당혹감과 도마의 의심사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뻐하는 제자들 공동체를 향한 예수님의 사명선언(21절-23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공동체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지를 이야기하는 본문의 핵심(봉투형구조)에 해당됩니다. 요한복음 17장 18절에 이미 언급되었던 미셔널한 사명(보냄받은 사명)을 다시 언급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요14,16장)을 직접 허락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요한복음이 "태초에..."로 시작되는 공통분모를 가진 창세기의 짝을 이룬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 인류를 창조하실 때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생령이 된 것처럼 이제 새로운 창조의 순간에 제자공동체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게 하시므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이렇게 본다면 23절의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의 말씀은 교회의 용서의 권세( cf.마18:15-20)를 넘어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언약의 비전(the blessed to be a blessing)과 맥이 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제자들은 성령을 받아 새사람, 새인류, 새생명을 얻고 예수님과 "함께"된 존재(17절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cf.엡2, 골3)가 되어 예수님이 이땅에 보내심을 받은 목적대로 죄사함의 복을 베푸는 사명을 이 세상가운데서 이어서 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물론 승천의 교리(17절)와 성령을 주심의 교리(22절)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이 교리적 진술과 상관없는 고백일 때는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도들이 보고 만지고 고백하고 기록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 그 예수님의 이름(존재와 사역)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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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is Club 고린도전서 7장 25절-31절      111114

몸의 사용과 관련하여 가장 초미의 문제인 결혼제도와 결혼관계에 대하여 "선물"의 관점에서(1-16절), 그리고 "부르심"의 관점에서(17-26절) 보도록 권면하던 바울은 이제 "때"의 관점으로 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임박한 환난"(26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29절),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 등, 종말을 의미하는 것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임박한 환난의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여러 모양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개인적인 환난의 때, 혹은 개인적인 종말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 두번째는 일반적이고 우주적인 종말로 이해하는 경우, 세번째는 N.T Wright의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하나님나라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해석, 이 세가지 관점중 어느 관점을 택하든지 간에 바울은 이 종말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삶을 상대화하여 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종종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라는 강조가 교회안에서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결혼을 하지 못하는 지체들이 심리적인 부담과 열등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29절과 30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결혼과 가정은 매우 중요한 개념임과 동시에 얼마든지 상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삶의 경험과 함께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장가가는 것도 시집가는 것도 죄가 아니라(28절)고 분명히 말합니다.  게다가 바울 자신이 독신이기 때문에 결혼자체에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남의 행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8절). 다만 그것에 목숨을 걸고, 그것이 마치 마지막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시각은 현실적이지도 않고(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지혜롭지도 덕스럽지도 못합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현실의 삶(아내 있는 삶, 우는것, 기쁜 것, 매매하는 것, 세상물건을 쓰는 것)을 긍정하지만 동시에 이 본문에서는 그것 자체가 목표나 목적인 것 처럼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그리고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 31절)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긍정하는 영성과 종말론적 관점,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일상의 삶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바울의 관점 둘다가 우리에게 균형으로 있어야 할 관점입니다. 일상의 이중성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치우치지 않는 이런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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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요한복음 1923-42111110

 

우선 요한은 자신의 증언이 얼마나 가까이에서 경험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증언인가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못박고 그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장면, 십자가 곁에 있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에게 부탁했다는 이야기,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하신 말씀과 신포도주를 받으신 장면, 다리를 꺾지 않은 채 군병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이 나오는 장면등을 묘사하면서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라고 그 묘사의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증언의 참됨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의 사실성과 육체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데는 이 책이 필요한 청중들의 필요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의 복음과 서신서들의 청중들을 생각하면 다양한 독자층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적 가현설론자(DOCETISM: 예수님이 실제로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육체로 오신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유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육체와 관련된 무수한 단어들(목마름, 시체, 다리, 옆구리, 피와 물, 시체등)과 함께 유독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다큐멘타리처럼 사실적으로 보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이 본문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사건들이 일관되게 성경이 말한 것을 응하게 하려한다고 요한이 판단한다는 점입니다. 시편 22:18, 시편 69:21, 12:46, 12:10등의 말씀들에서 이야기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조목 조목 성취되고 있다고 말하므로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38절 이하에서 숨은 제자들이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전격적인 활약으로 행해진 장례절차 이후 실제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갔던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동일하게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예감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구약의 스토리에 노출되어 있던 유대교 출신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결국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 여겨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던 유대교 출신 독자들이나, 육체로 이루신(다 이루었다 cf.28, 30)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을 스캔들로 여기고 지혜롭지 못한 미련한 것으로 여기던 헬라문화 출신 독자들에게 정면으로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을 다큐멘터리 형태로 리얼하게 이야기함으로 도전하면서 동시에 논박하며 변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사실성을 변증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유대교의 일반적인 성경인용방식을 활용하면서도 동시에 유대인의 편견을 논박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시대의 방식을 활용하면서도 우리 시대에 십자가의 의미와 사실성을 증언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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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iS Club 고린도전서 717-24절 요약 111024

 

이 본문을 문맥과 상관없이 읽거나 피상적으로 읽게되면 오독(誤讀)하게 되어 바울은 영락없이 체제순응적인 기독교를 부르짖고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께 함께 거하라라는 바울의 권면이 자신의 한계와 구조의 억압을 극복하고 뚫고나가려는 의지를 꺾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만 찬찬히 읽어 보더라도 이것은 정당하지 못한 주장입니다. 노예에게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라는 등의 권면은 그 당시로서는 취하기 쉽지 않은 생각을 바울이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는 맥락에서 결혼과 관련된 주제를 다각도로 다루고 있는 문맥에서 부르심”(9회반복)으로 한 번 정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7절에서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선물(은사)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한 그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라고 다시금 선물의 관점에서 문제를 대할 것을 강조하면서 부르심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18-20절은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대비를 통해, 21-24절은 종과 자유인의 대비를 통해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울의 부르심이해는 정적(static)이기보다 훨씬 역동적(dynamic)합니다. 겉으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라고 이야기하므로 있는 자리에 속박시키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바울은 어떤 사회적 상태, 종교적 외양을 무위로 돌리면서 현재를 부르심이라는 더 고상한 가치로 관조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할례자가 할례자가 될 수 있고, 종이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 두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어떤 행위나 외양이나 사회적 상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마느냐(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19)”이며 주께 속하였느냐 아니냐(주께 속한 자유인, 그리스도의 종 22)”이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24)느냐 아니냐입니다. 이것을 부르심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쌍꺼풀 수술과 같은 성형수술을 하느냐 혹은 술을 먹느냐 마느냐등과 같은) 이런 부르심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될 때 훨씬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상력으로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본다면, 결혼이 좋은 것이다 혹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 보다 현재 결혼한 상태 혹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를 부르심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소속과 교제를 더 중시하며 살게 되면, 뜻을 따라 상황이 변하게 될 때에도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면 변할 수 있고 그것을 또 다른 부르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어떤 도그마의 노예가 아닌 참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선물의 관점과 부르심의 관점으로 공동체 내에서 몸의 사용과 결혼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목회적 전망을 우리가 이해할 때에야만 고린도전서 7장의 가치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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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요한복음 191-22절 요약 111006

 

다른 공관복음서는 다분히 빌라도의 재판정에서의 분위기보다 십자가까지의 길과 사건을 자세하게 다루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빌라도의 심문과정이 다큐멘터리 기록물처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현장에 없던 사람들에게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저자의 의도를 느낍니다. 그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반복되는 단어를 보면 이라는 단어(8)가 들어가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진술과 십자가라는 단어(8)가 많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2절과 5절의 가시나무 관, 자색옷은 비록 조롱의 뜻이겠지만 의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12절과 15절의 유대인이 빌라도를 협박하며 밀어붙이는 말 중에 가이사란 단어는 잘 알듯이 다름 아닌 로마의 황제 칭호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황제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반역하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언도되는 사형입니다. 그런데 이 사형이 유대인들에게 치명적인 것은 신명기 2123절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종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격리된 자)로 판단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식민지의 총독으로서 식민지가 평안히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주된 임무입니다. 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이 몇 번이나 진술하듯이 로마의 법리로 보았을 때 예수께서 무죄한 분이시라(4, 6, 12, 15절등)는 것을 인식하였으나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우유부단함을 본문 내내 보이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약간 예수님을 조롱하는 해프닝을 보이면서도 그의 무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유대인들이 그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는 말을 듣고 아마도 고대인들이 느꼈을 모종의 영적두려움으로 예수님을 대합니다. 8절에서 11절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출신을 묻는 너는 어디로부터냐라는 질문을 하면서 총독으로서의 놓아줄 수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있는 막강한 자신의 권한(power)으로 예수님을 윽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출신과 자신의 권위(power)가 위로부터 온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심으로 빌라도를 압도합니다. 12-16절에서 빌라도는 이런 압도감에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힘쓰지만 결국 유대인들의 초지일관한 열정, 즉 예수님을 어떤 모양으로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밀어부침, 즉 가이사에 대한 충성이라는 명분하에 금방 입장을 선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도록 내어줍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장면을 묘사하는 18절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혁명가, 실패한 정치혁명가로서의 죽음을 보여주는 이미지임에 틀림없습니다. 19-22절에서 예수님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하고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논쟁하면서 고집하는 장면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발현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는 듯한 발언인 듯 합니다.

 

전술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의 치밀함과 초지일관함이 빌라도의 우유부단하고 민심의 동향에 눈치를 보는 리더십과 합체되어 예수님을 명백히 외양으로는 정치적인 역학관계의 희생물이 되는 그림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치졸함과 우왕좌왕하는 정치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power game의 희생물이지만 이 소음들, 이 소용돌이 가운데 자신이 위로부터온 자이며, 그 권위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계신 분이시기에 (11) 그는 흔들리지 않고 정치적 희생물로서 십자가 죽음을 감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다양한 소음들속에서 쉽게 나부끼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예수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의 자기정체감과 처신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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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iS Club 고린도전서 7장 6절-16절 요약    110926


대개 고린도전서 7장은 전체적으로 독신이었던 바울이 결혼에 대해 약간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권면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바울의 독신이 결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의 독신이었을 것이라는 전제로 본문을 읽을 때 바울은 육체와 성과 결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자라고 결론내리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만약 F.F. Bruce등과 같은 복음주의 성경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이 결혼을 했으나 독실할 유대인 아내에게서 갈라섬(이혼, 갈라섬이란 단어가 이 본문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도 주목하라)을 당하여 현재 홀로 있는 자가 되었다면 본문은 다른 관점으로 읽히게 됩니다. 오히려 본문은 공동체 안에서 결혼관계를 둘러싼 실제적인 고민들에 독선적이기보다 애정넘치는 타당한 조언을 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혼하는 것, 이혼하는 것, 사별하고 과부로 사는 삶, 불신 배우자와의 결혼생활들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기 쉬운 오류 즉 “  ”하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라고 묻는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도그마적인 접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나.” 말하자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받은 “선물”로 이해하자는 제안입니다. 결혼하는 것도, 혼자 사는 것도, 불신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도, 심지어 갈라섰다면 적어도 그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범위안에서 그 상태를 선물로 이해할 때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 수 있고, 거룩과 화평과 구원을 추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결혼을 해야 한다는 도그마로 이해하면 그냥 지내는 이들은 자신의 상태를 선물로 이해하지 못하고 뭔가 낮은 삶으로 여기게 됩니다. 결혼한 사람은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주의 명령이 그러하기 때문에 갈라서지 말아야 합니다. 선물로 받아들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연약하여 갈라섰다면(대개는 이혼을 당하는 경우) 그대로 지내든지 상대방과 합하려 해야지 다른 배우자를 선택함으로 선물로 주신 결혼관계의 귀중함을 낮추어서는 안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불신 배우자와의 결혼생활 역시 대원칙은 갈라서도록 요구받지 않는 한 이 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불신상태에서 결혼했다가 도중에 한편이 믿게 되었든지, 아니면 믿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불신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경우라도 이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관계속에서 “거룩”을 전염시키는 삶(14절), 하나님은 화평중에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의식하며 상대 배우자를 향한 구원에의 의지를 갖고 살아가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요인중에 상당히 큰 요인입니다. 이런 결혼을 둘러싸고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대화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현대의 다양한 가족형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참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바울의 애정어린 권면들에서 보이는 한 가지 중요한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거룩과 화평과 구원을 이루는 방향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대 원칙은 욕구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거든 결혼하여야 하는 데(9절) 결혼한 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이혼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10-11절). 물론 바울은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 같지 않습니다만 이미 결혼한 상태의 일부다처 혹은 다부 일처(polygamy)와 같은 상황에서도 이런 큰 지침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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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 요한복음 1828-40110908

 

공안정국(?)의 느낌이 계속되는 가운데 예수님은 이제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 갑니다. 예수님을 끌고 간 유대인(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의 하수들)들은 빨리 이 문제를 처리하고자 새벽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밀어 넣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림자인 종교적인 정결함(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을 의식하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최근 기독교우파 권력자들의 행태와 비교하면..). 18장 전체로 보면 1-12절의 하수들은 현대의 경찰의 역할을 지금 여기 유대인들은 검찰의 역할을 그리고 빌라도는 법원의 역할을 하면서 폭력적 상승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의 대화의 기록입니다. 아마도 빌라도의 말속에는 새벽에 밀어닥친 재판건에 대한 짜증이 묻어 있지만, 생각보다 로마의 총독치고는 이리 저리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눈치 보는 흔적(29밖으로 나가서” 39전례”)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법대로를 따지는 법리원칙주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론의 향배에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그제나 이제나 법의 집행자들의 한계를 보는 것입니다. 29절에서 32, 그리고 38절 하반절부터 40절에서 이런 빌라도와 유대인(다수의 일반적 유대인들이라기 보다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의 사주를 받은 소수의 유대인일 가능성이 더 있어 보인다)의 관계를 엿보게 됩니다. 빌라도의 일관된 총독으로서의 관심은 아마도 로마식민지배에 반역하는 나라에게 있었기 때문에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라고 이야기했고 그 관점에서 예수님에게서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38절에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선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범죄가 아니면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라는 빌라도의 짜증(?)에 얼른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31)”라고 말하므로 로마법에 근거하여 사형에 해당되는 행악을 저지른 자라는 암시를 줍니다.

 

33절에서 38절 상반절에 걸친 빌라도의 예수님에 대한 심문중의 대화는 총독이라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빌라도와 한치도 양보없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예수님의 동문서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추론한 빌라도의 재판을 할 가치가 있는 전제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종종 있었고 그것을 막고 차단하는 역할이 총독으로서 제일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소과정에 다 참여하여 듣고 있었을 예수님은 이 느닷없는 질문에 당신이 스스로 하는 말이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당신에게 그렇게 말을 했소?”라고 되묻습니다. 이런 반응에 역시 빌라도는 약간 짜증이 난 듯 합니다. “내가 유대인이냐?”라고 묻고 나서 도대체 당신이 무슨 일을 하였기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기게 되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다고 한 것도 아니고 아니라고 한 것도 아닌 미묘한 것입니다만 풀려 날 것을 기대하는 사람의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권력을 조롱하는 듯 느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빌라도에게 뭔가 중요한 것을 소통하시려는 마음이 느껴지기도 하는 그런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일관되게 유대인들에게 분명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소통하려 하셨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한 바로 그 내용을 지금 빌라도(비유대인)에게도 하고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10하반절)”라는 요한복음의 일관된 주장이 여기서도 증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관심인 나라이야기를 했지만 유대나라와 유대인의 왕이 아닌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의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나라는 진리의 나라이며 자신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주장은 일관되고 명확한 주장이지만 합리적 법치주의자이며 동시에 여론의 추이에 관심있는 생활인으로서의 빌라도로서는 이런 주장이 황당무개하고 별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을 것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라도의 반응인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반응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진리고 나발이고...” 혹은 진리는 무슨 개뿔?”과 같은 반응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을 하고그가 한 일은 진리를 추구하는 어떤 후속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그에게서 자기가 찾는 죄를 발견할 수 없으니 전례에 비춰 이 사람을 풀어줄까하고 묻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주 빌라도는 성경을 대하는 자들에게 긍휼(?)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명백한 진리가 증언되어도 자신의 관심과 생활인으로서의 자기일관성으로 인해 진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못한 모습은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진배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조차 너무 동떨어진 동문서답처럼 느껴지는 것은 현실의 문제, 땅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진리의 증언에 노출되어도 그것으로 내 삶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현실이 곧 하늘과 맞닿아 있으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오늘을 사는 빌라도와 같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진리의 증언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때 거기에는 역사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무의미한 조롱과 유희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 사람이 아니라 바나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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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iS Club 고린도전서 7장 1절-6절 요약     110905


몸은 바울의 고린도교회를 향한 권면의 핵심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몸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뗄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6장에서 우리의 몸이 얼마나 중요하며 무엇을 위해 중요한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6:12,13b).”"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9-20).“


이런 대전제의 맥락에서 바울은 이제 결혼과 성의 문제를 7장에서 다루기 시작합니다. 7장 전체는 요즘 코미디프로에 나오는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6절).” 바울과 서신교환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는 1절(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touch) 아니함이 좋은가?”라는 질문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성적인 욕구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이런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음행(sexual immorality)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서로 의무를 다하라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는 원칙과 사탄이 시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서로 분방하지 않아야 할 필요에 대해 강조합니다.


몸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성의 문제와 결혼생활의 문제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몸은 자신의 것이라는 의식때문에 몸을 함부로 사용하는 성적인 방종이 가능했고 혹은 결혼생활 안에 헌신(獻身)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리므로 현실적으로 성적인 일탈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고 만지고(touch)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것이 방향을 잃게 되면 성적방종이나 성적일탈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안에서 이 문제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성적인 유혹을 느끼면서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욕구나 이유가 “자기 몸을 주장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본문은 어떻게 성적인 존재로서 몸의 문제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실제적인 제안을 본문이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잠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부부가 서로 합의하여 정해둔 시간만큼(얼마동안은 하되) 의지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다시 합하라라는 바울의 권면은 현대의 주말부부나 기러기 부부와 같은 경제적인 이유나 혹은 자녀 교육을 위한 상황으로 인해 떨어져 있는 부부들에게 한 번 더 동기를 살피고 자신의 몸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라는 실제적인 제안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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